
솔직히 말하면 나는 얼마 전까지 폭락론자였다.
매일 기술 유튜버들이 쏟아내는 AI 이야기를 보면 진짜 2~3년 안에 어마어마한 세상이 펼쳐질 것 같았다.
1년 전에 말도 안 된다고 했던 챗GPT 성능이 지금은 구닥다리가 됐고,
몇 줄짜리 문장 하나로 프로그램이나 웹사이트를 만드는 클로드가 등장하더니
하루가 다르게 새 모델을 내는 걸 직접 체감하다 보니,
어릴 때 미술 시간에 그려 제출하던 미래 도시가 금방일 것 같았다.
그러면 집은 비가리개 외에는 아무런 가치를 창출할 수 없는 쓸 데 없는 것이었다.
진짜 필요한 건 토큰과 에너지뿐이지,
닭장 같은 콘크리트를 20억이나 주고 살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자산이라는 건 누군가의 지속적인 수요가 있어야 하는데,
AI 발전으로 일자리가 대폭 줄어든다면 지금 가격은 곧 무너질 거품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명퇴 이야기가 나오고 20대는 일자리가 없다는데, 누가 사줄 것이냐 이 말이었다.
그런데 결국 재개발 구역의 단독주택을 구매하게 됐다.
재개발 입주가 될 때까지 8년간은 몸테크를 하기로 하면서까지 말이다.
이건 FOMO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왜 빌라, 단독주택, 오피스텔 등 다른 주거 형태도 있는데
아파트 집값만 올라서 이렇게 전 국민이 FOMO를 느낄 수밖에 없는 형태가 되냐,
그 구조적인 이유에 관한 이야기다.
📊 지금 서울 아파트 가격은?
-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 (2024년 12월 기준): 15억 810만 원
- 마포·용산·성동 등 한강벨트: 20억 전후
- 2025년 서울 아파트 상승률: +11.19% (전국 평균 +1.37%)
- 비수도권 대부분: 하락
출처: KB부동산
강남-비강남 격차는 2003년에 2.6억 원이었는데 2025년에는 22.1억 원으로 22년 만에 10배가 됐다(경실련 분석). 그럼 왜 이 가격이 쉽게 안 꺾이는지, 내가 납득한 이유 4가지를 정리해본다.
1. 호텔에 익숙해진 사람은 모텔을 못 간다
이십 대 초에 지방 여행지에서 처음 가본 모텔은 진짜 신세계였다.
침대도 크고 새하얀 침구에 방도 깨끗하고 가격도 저렴했다.
모텔이 이렇게 좋은데 호텔만 고집하는 사람들은 다 사치에 허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삼십 대가 되고 한 번 두 번 호텔을 가다 보니 이제 모텔은 가기가 불편해지는 곳이 되었다.
사람들 시선 문제가 아니었다.
객실에 따라 달라지는 컨디션, 운이라도 나쁘면 침구류 깊숙하게 베어 있는 담배 쩐내,
냄새가 나서 도무지 잘 수가 없다고 항의해도 다 비슷하다며 나 몰라라 하는 주인장.
모처럼 온 여행지에서 행복한 기분을 돈 몇 만 원에 날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내가 그렇다. 살고 있는 전세 집은 40년이 되어 재건축을 하고 있는 아파트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흉가인 줄 알 정도로 상태가 엉망이었다.
실제로 한 유튜버가 재건축을 소개하며 "이런 데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멘트를 했다.
모욕감을 느꼈지만 누가 봐도 낡은 건물이었다.
그런데 이 집을 빼서 단독주택으로 가려고 하니 한숨부터 나온다.
이 집에서 누렸던 것들 — 훌륭한 조망권, 큰 창으로 인한 환기, 아파트 외부 세대와의 분리, 하다못해 분리수거까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가졌던 것을 잃는 기분은 꽤 참담하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얻는 즐거움보다 잃는 것에 대한 절망감이 더 크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걸 손실 회피(loss aversion)라고 부르는데,
같은 크기의 이득보다 손실을 약 2배 더 크게 느낀다고 한다.
아파트를 한 번 경험한 사람이 빌라나 단독주택으로 자발적으로 내려가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닭장 같은 아파트를 거지 같은 콘크리트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
그렇지만 반대의 상당수도 아파트를 최상위 주거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이 심리가 수요를 유지시킨다.
2. 대한민국에는 아파트 이상의 나은 주거 공간이 없다
얼마 전 서울시장 후보로 나온 정원오 후보가 빌라와 다세대주택 공급을 늘린다고 했다가
꽤나 곤욕을 당한 바가 있다.
뉴스 댓글에는 "빌라도 집이다"는 글이 많이 달렸다.
맞다. 빌라도 훌륭한 집이다.
어려서 반지하에 살던 나는 초등학교 때 신축 빌라에 구경을 가서 정말 궁궐이라고 생각했다.
25년 전쯤 가격은 9천만 원.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집에 얼마가 있는지도 모르고 궁궐에서 살 생각에 사자고 엄마를 엄청 졸랐던 기억이 난다.
물론 다행히도 사지는 않았다.
왜 다행이었냐 하니 일단 가격이다.
아파트는 오르기만 하는데 빌라는 떨어지기만 한다.
그때 샀으면 그 빌라는 물가 상승률 보전도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 이후에 부모님은 아파트를 샀고 물가 상승률은 보전받고 있다.
그럼 지금 아파트를 팔아서 싼 값에 빌라를 다시 들어가면 되지 않냐고? 그건 정말 힘들다.
아파트는 빌라가 가진 것을 모두 갖고 있지만,
빌라는 아파트가 갖고 있는 것을 갖고 있지 못한다.
주차 공간, 조경, 큰 베란다.
같은 연식이라고 비교했을 때 아파트는 늘 빌라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갖고 있다.
오피스텔은 빌라보다 조금 낫지만 단기 거주라는 성격이 강하다.
단독주택은 말할 것도 없다. 모든 것을 집주인이라면 내가 해야 되고, 세입자라면 집주인에게 의존해야 한다.
📊 아파트 vs 비아파트 격차는 더 벌어진다
주택산업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신축 아파트 선호 현상이 3040 세대를 중심으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향후 아파트와 비아파트 간 가격 격차는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주택거래 건수에서 비아파트 비중이 꾸준히 줄어드는 게 이를 반영한다.
3. 공급이 구조적으로 안 된다
집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공급이 되지 않는다. 수요가 있는 한은 메모리 쇼티지 마냥 폭등한다.
그리고 서울은 지금 공급이 구조적으로 막혀 있다.
📊 서울 공급 절벽 수치
- 서울 착공 물량: 2020년 대비 절반 수준으로 감소
- 2025년 입주 예정 46,780호 → 2026년 24,462호 (절반 가까이 급감)
- 2026~2030년 연평균 입주 전망: 약 4,000호 (2020년까지 연평균 12,000호의 3분의 1)
- 서울 아파트 입주 중 정비사업(재개발·재건축) 비중: 91% (2024년 기준, 역대 최고치)
- 서울 정비사업 평균 추진 기간: 18.5년
출처: 파이낸셜뉴스(2026.04), 한국도시환경헤럴드, 부동산R114
택지가 없다. KOSIS 통계를 보면 서울시 택지 지정 면적이 2001~2010년에 15,313천㎡였던 게 2021~2023년에는 250천㎡로, 10년 전의 10분의 1 이하로 쪼그라들었다.
서울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새 택지를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재개발·재건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그 재개발·재건축이 평균 18.5년이 걸린다.
내가 산 집도 재개발 구역이고 8년을 기다려야 한다. 이게 빠른 축이다.
서울 아파트 중 준공 25년 이상이 전체의 51.2%다(KOSIS 2022년 기준). 노후 단지의 재건축 수요는 갈수록 커지는데, 공급은 갈수록 좁아진다. 이 구조에서 가격이 쉽게 떨어지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4. 서울은 살만한 사람들이 계속 모이는 동네다
사실 단독주택이고 빌라고 살 수 있다.
당장 먹고 살게 없다면 곰팡이가 그득그득한 원룸이라도 산다.
그런데 살만할 때는 다르다.
아파트에 안 살면 아이를 못 키울 것 같고,
치안이 걱정되고,
주차하느라 매일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고,
주민들 수준 차이가 날 것 같고.
다 허상 같은 이야기고 실제와는 다르지만 어쩔 수 없다.
특히 안정적인 커뮤니티.
이건 나도 정말 웃기지도 않은 뭔 신종 헛짓거린가 싶지만,
막상 살아보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솔로를 보면 안다.
이삼일 만난 사람을 천년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출연진을 밖에서 보면
정신이상자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은 그 환경에 지배된다.
아파트 커뮤니티를 맛 본 상당수의 사람도 그러하다.
그러면 사람들은 계속 살만한 것이 맞을까?
서울 사람들이라면 살만한 사람이 맞다.
서울은 살만한 사람이 들어오는 동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렇게 반론할 수도 있다.
"서울 인구 줄어들고 있는데?"
서울 등록 인구는 줄고 있는 게 맞다.
그런데 이 숫자만 보면 절반만 본 거다.
서울에서 빠져나간 인구 대부분은 경기도와 인천으로 갔고,
수도권 전체 인구는 오히려 증가해서 전국의 50.8%인 2,630만 명이 됐다(2024년 통계청). 서울을 중심으로 한 생활권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지, 수도권 수요 자체가 줄어드는 게 아니다.
📊 20~30대는 서울로 들어오고 있다
서울시 인구이동 분석(2001~2024, 2026년 1월 공개)에 따르면 2019년 이후 20~30대의 서울 순이동이 플러스로 전환됐고, 2021년을 제외하면 계속 유지되고 있다. 일자리·교육·문화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한 이 흐름은 바뀌기 어렵다.
지방이 소멸되고 있는 지금 더더욱 그럴 거다.
누군가 도태되어 나가면 새로운 누군가가 들어온다. 그래서 이 심리는 유지된다.
그렇지만 망할 수도 있다
출산율은 눈에 띄게 회복되지 않고,
청년들 일자리는 없고,
가계와 기업들은 달러를 비축하고 있다.
환율은 1,500원대 중반을 유지하고 있고,
물가는 폭등을 하며 금리마저도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단순 금리 역전으로 환율이 오른 게 아니라
대한민국의 성장성에 의심을 둔 환율 상승이라,
금리가 오른다고 물가가 떨어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날이 진짜 와서
서울 부동산까지 폭락을 하면 어차피 다 망한다.
20억짜리가 10억이 되면 코스피는 안전할까?
당장 먹고살 문제가 생기면 대중들은 집부터 팔까 주식부터 팔까.
당연히 주식부터 판다.
그러면 코스피는 다시 2,500으로 회귀한다.
서울 부동산 폭락을 생각한다면 모두 달러 자산으로 바꾸고
미국 주식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
나도 그게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다면?
반도체가 정말 반전의 씨앗이 되고,
변압기가 조선이 방산이
향후 10년간 대한민국을 유지할 수 있게끔 하는 씨앗이 된다면,
그때는 수도권 집을 사야 한다.
확률은 모르겠다.
사실 반반이다. 그럼에도 살 집은 있어야 하니 집을 샀다.
어차피 1채이고 당장 팔 수도 없기 때문에 폭등도 바라지 않는다.
폭등을 한다고 해서 팔고 싼 데로 이사를 가기도 쉽지 않을 거고,
폭등을 하면 내 주위 무주택자 가족과 친구들이 힘들어진다.
돈 몇 푼에 주위 사람들이 괴로운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저 집값이 계속 오르고 있기 때문에 그냥 흘러가는 흐름에 맡긴 것일 뿐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 아파트를 경험한 사람은 심리적으로 하향 이동을 거부한다
- 빌라·오피스텔·단독주택은 아파트의 대체재가 되지 못한다
- 공급은 구조적으로 막혀 있다 — 착공 급감, 평균 18.5년짜리 정비사업
- 서울 인구는 줄어도 수도권 수요와 20~30대 유입은 계속된다
주요 통계 출처: KB부동산(2024.12), KOSIS, 파이낸셜뉴스(2026.04), 서울시 인구이동 분석(2026.01), 경실련(2025.05), 주택산업연구원, 부동산R114